저자 | 역자/편자 | 조형열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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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2.4.30 | ||
ISBN | 9791159055508 | ||
쪽수 | 636 | ||
판형 | 신국판 양장 | ||
가격 | 51,000원 |
1930년대 한글신문을 통해 돌아보는 조선연구의 성장과정
근대 이후 등장한 조선연구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떠한 계기로 형성되고 전개되는가?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한 자기인식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자기에 대해서 연구하는 ‘자국학’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수립되었는지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탐색 필요성을 질문 가운데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의(語義) 차원에서만 해석하면 조선연구는 연구 능력을 갖춘 주체의 조선에 대한 지적 활동이다. 그러나 이를 근대라는 시간적 맥락과 접목시키면 근대적 학문 방법론을 접한 지식인이 조선을 역사적·현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대중적으로 읽히고자 하는 의도 아래 수행된 활동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서구 근대의 방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분석하고 그것을 대중과 공유하면서 일정한 공감대를 일으키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조선연구가 궤도에 올랐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하자면, 우리가 그동안 조선연구의 성과라고 지칭해왔던 개별 연구자의 특정 논저만으로 조선연구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한계가 있다. 조선연구의 담론과 실제, 조선연구 방법을 둘러싼 논쟁 등 조선연구의 성장과정을 조망함으로써 조선연구의 전체상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제국주의 통치 담론, 국제정세 변동과 지식인의 현실 참여 문제, 식민지 조선의 학문적 역량의 변화과정 등까지 아울러 분석할 때, 개인의 역량에 그가 속한 집단의 활동 방향 및 학술장의 지형과 정치정세 등이 중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포착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근대 조선연구의 충실한 재현이 가능할 것이다.
조선연구의 지형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1930년대 한글신문의 학예면 안팎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게 이 자료집을 묶어내는 이유이다. 조선연구는 1900년대 국어학‧국사학 등을 중심으로 발흥하여 1930년대에 조선학의 정착 시도와 함께 분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30년대가 조선연구의 중요한 갈림길이 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공통된 견해라고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조선연구 논의를 담아내고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매체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의 한글신문이었다는 점은, 학술 기획이 민간의 신문지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식민지 학술장의 특징을 보여준다.
1930년대 한글신문의 학예면과 조선연구의 상관성은 특별히 주의 깊게 탐구되어야 할 연구과제이며, 신문사와 편집진의 조선연구 기획, 그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의도 및 주장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를 본격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학술문화를 표면에 내세우는 신문사 운영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각 신문사마다 어떤 인물들이 조선연구 기획에 관여하게 되는지 개별적 분석도 요청된다. 한마디로 1930년대 한글신문의 학예면이 조선연구의 성장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
『식민지 조선학계와 조선연구』 1권의 주요 내용
1930년대 한글신문 학예면 안팎의 조선연구 관련 기사를 범박하게 구분해보자면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조선연구를 제창하고 조선연구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 조선연구가 필요하고 어떠한 학문적 방법론으로 연구를 할 것인지 다투는 일종의 조선연구 담론에 해당한다. 둘째, 자신의 학문 분야에 따른 조선연구의 성과를 선보이는 것이다. 어학, 문학, 역사학, 민속학 또는 사회과학·자연과학 방면의 논문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굉장히 많은 분량에 해당한다. 셋째, 조선연구의 주체 및 결과물에 대한 관심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연구를 이끈 인물이나 단체 또는 자료 및 저작 등에 대해서 소개·비평하는 등 일종의 실제적 논쟁 단계를 다루는 기사들이다. 전체 두 권으로 선보일 <식민지 조선학계와 조선연구> 자료집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첫째와 셋째이다. 둘째는 기사 종류도 워낙 많고 분야도 세분화되어 있어 글을 모으는 것이 생산적 작업이 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첫째는 조선연구를 다루는 주체의 의도와 관점의 변화상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셋째는 조선연구를 둘러싼 논쟁을 포함해 실제 지형을 보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첫째가 1권이 되었고, 셋째를 추후 2권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조선연구 담론을 수집한 1권에는 ‘문화‧학술진흥론과 조선연구의 방법’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조선연구의 진흥 계획이 조선문화의 구축 또는 조선학술의 뼈대 세우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과 조선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논의가 함께 쏟아져 나온 상황을 제목에 담았다. 문화·학술진흥론은 문화운동 또는 학술 자체 육성 목적으로 조선연구가 강조된 측면을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선민족의 학술, 조선인을 위한 학술이 되어야 한다는 민족문화 건설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혁명을 목표로 노농계급의 주체화를 위한 조선연구를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문화(또는 사회주의 민족문화) 건설론도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논의들의 쟁점은 민족문화의 성립 가능성과 민족문화의 현재적 의미 같은 것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이 개진되면서 신문지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학술 진흥을 위한 시설 구축 및 학술단체 설립 계획 등이다. 식민지 민간 아카데미즘을 형성하기 위해서 신문사나 사립전문학교 등의 역할을 촉구한다든지, 재력가·장서가의 헌신을 요구하거나, 장래에 만들 각급 연구소 구성안 등이 소개되었다. 이는 민족문화 건설론과 결합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해방이후 학술단체의 조직 등과 관련해서도 주의 깊게 살펴볼 점이다.
다음으로 조선연구 방법은 1933년 무렵 조선학 수립론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탐색되었다. 방법론은 아무래도 출발 단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의 영역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선연구에 역사유물론의 법칙성을 방법으로 부여하고자 했다. 김태준과 신남철이 국학적 연구의 극복을 제안한 이래로 민족과 세계, 보편과 특수 등 조선을 연구하는 범주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의 과학적 연구에 대한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일련의 변화도 감지된다. 고전과 전통을 재발견해야 하다는 주장과 인간의 창조력을 중요하게 보는 관점도 성장하면서 점차 조선연구 방법론에서도 양대 진영이 뚜렷이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자료집은 1930년대 후반 문화옹호, 고전부흥, 전통론 등이 조선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검토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주제와 소재의 일정한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자기를 연구하는 방법의 개진이라는 점에서 함께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많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학계와 조선연구』 1권의 구성상 특징
이 자료집은 완성된 연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조선연구의 궤적을 탐구하고자 하는 목표 아래, 1930년대 신문지상의 조선연구 기사에 대한 독법(讀法)을 모색하고 이를 관련 연구자들과 소통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따라서 조선연구에 대한 신문기사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며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기사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고안했다. 1권의 경우 조선연구 담론에 대한 두 개의 주제를 포괄하면서 하나의 기사에 양쪽 내용이 모두 거론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신문지면의 조선연구 담론을 발표 순서대로 보는 것도 변화상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93개 기사를 시간 순으로 수록했다.
신자료 발굴의 성과를 집약하는 통상적 의미의 자료집과는 의미가 조금 다른 이 자료집을 만들면서, 조선연구의 중층적 환경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랐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인터넷으로 신문자료를 볼 수 있는 현실에서, 국문학·국어학·국사학과 같은 조선연구의 직접적 성과보다는 주변의 것들을 두텁게 모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유관분야 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급적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현대어 표기를 따랐다.
일러두기 2
해제:문화·학술 진흥론과 조선연구의 방법 11
기사 본문
01 「(사설) 학술적 자주」(상)(하)『동아일보』, 1927.3.17~18 33
02 「(사설) 조선의 원시상-교간 『삼국유사』의 감」(상)(하) 『동아일보』, 1927.3.24~25 38
03 「(사설) 학구적 노력의 부족」 『조선일보』, 1930.9.15 44
04 「현실 조선의 재인식」(1)~(6)신일성, 『조선일보』, 1930.10.1~9 46
05 「조선학의 국학적 연구와 사회학적 연구」(상)(하) 김태준, 『조선일보』, 1933.5.1~2 60
06 「사안으로 본 조선」(8)~(9) 문일평, 『조선일보』, 1933.5.13~16 64
07 「(사설) 문헌이 결핍한 조선, 사학도서관에 요망」 『조선일보』, 1933.12.25 68
08 「(사설) 위인의 기념」 『조선일보』, 1933.12.26 70
09 「최근 조선연구의 업적과 그 재출발」(1)~(4) 신남철, 『동아일보』, 1934.1.1~7 72
10 「(사설) 과학과 조선」 『조선일보』, 1934.3.5 83
11 「(사설) 보전학보의 문화적 의의」 『동아일보』, 1934.3.22 85
12 「(사설) 조선어의 지위와 생명」 『조선일보』, 1934.3.27 88
13 「(사설) 조선문화의 연구」 『조선일보』, 1934.4.9 91
14 「(사설) 고적보존의 요체」 『조선일보』, 1934.5.4 93
15 「(사설) 진단학회의 창립, 유종의 미가 있으라」 『동아일보』, 1934.5.9 95
16 「(사설) 조선문화의 과학적 연구」 『조선일보』, 1934.5.10 98
17 「(사설) 학문과 노력」 『조선일보』, 1934.7.9 100
18 「(사설) 정다산의 위적, 99년기에 제하여」 『조선일보』, 1934.9.10 102
19 「조선연구의 기운에 제하여 (1) 조선학은 어떻게 규정할까, 백남운 씨와의 일문일답」 T기자, 『동아일보』, 1934.9.11 105
20 「조선연구의 기운에 제하여 (2) 세계문화에 조선색을 짜넣자, 안재홍 씨와의 일문일답」 T기자, 『동아일보』, 1934.9.12 109
21 「조선연구의 기운에 제하여 (3) 조선학이란 명사에 반대, 현상윤 씨와의 일문일답」 T기자, 『동아일보』, 1934.9.13 112
22 「조선과 르네상스 필요한가? 또 가능한가?」(상)(하) 송강, 『동아일보』, 1934.9.15·17 114
23 「(사설) 문화애와 공덕」 『조선일보』, 1934.10.15 118
24 「(사설) 사료 수집의 필요」 『조선일보』, 1934.10.29 120
25 「수년 내 전개된 조선의 점점상-논단·평단에 보내는 감상 이삼」(상)(하) 정노풍, 『동아일보』, 1934.12.27~28 122
26 「학술부대의 참모본영 각양각색의 진영과 기 업적」 『동아일보』, 1935.1.1 129
27 「조선의 문화유산과 그 전승의 방법」(1)~(8) 박사점, 『동아일보』, 1935.1.1~9 135
28 「고전연구의 제문제」(1)~(3) 정래동, 『조선중앙일보』, 1935.1.18~20 155
29 「특별논문을 읽고」(3)~(5) 신남철, 『동아일보』, 1935.1.29~2.1 162
30 「조선의 문화유산 특수성과 아울러 그 전승방법」(1)~(13) 우우자, 『동아일보』, 1935.2.1~16 171
31 「(사설) 기념도서출판관에 대하여」 『조선일보』, 1935.3.17 208
32 안재홍, 「문화건설 사의」(1)~(7), (12)~(13) 『조선일보』, 1935.6.6~13·19~20 211
33 「학계의 빈곤」 오메가, 『동아일보』, 1935.6.13 232
34 「신시대의 전망(기 6) 사상 조선사상계의 과제」(상)(중)(하) 전원배, 『동아일보』, 1935.6.15~18 234
35 「문화 앙진의 신공작, 문화공작의 신제창, 세계적 조합 문화의 섭취, 현하 과정과 당면 과제」 안재홍, 『조선일보』, 1935.7.6 242
36 「조선사 연구의 방법론적 관견」(상)(하) 김강수, 『조선일보』, 1935.7.10~11 246
37 「(사설) 서세 백년의 다산선생 ‘백세가사’의 광부와 열성」 『조선일보』, 1935.7.16 250
38 오메가, 「고전 전승의 방법」(상)(하) 『동아일보』, 1935.7.26~27 253
39 「(사설) 조선연구기관을 만들자」 『조선중앙일보』, 1935.9.27 256
40 안재홍, 「천대되는 조선」(1)~(4) 『조선일보』, 1935.10.2~6 258
41 「공식과 문학사」 김남천, 『조선중앙일보』, 1935.10.4 268
42 「한 개의 유치한 ‘폴레모스’」 신남철, 『동아일보』, 1935.10.6 269
43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 안재홍 씨에게 답함」(1)~(8)김남천, 『조선중앙일보』, 1935.10.18~27 271
44 「김남천씨의 억설을 읽고 어찌 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를 ‘나치스’의 색채로 채색하려는가」(1)~(2)김석종, 『조선중앙일보』, 1935.11.1~2 290
45 「논단시감 (5) 천대되는 조선에 대한 시비」 전원배, 『동아일보』, 1935.11.15 295
46 「논단시평」(4)~(7) 전영식, 『조선중앙일보』, 1935.12.1~5 298
47 「문화조선의 다각적 건축, 자력을 기다리는 새로운 영야, 꾸미라 세우라 이 터전 위에!」 『동아일보』, 1936.1.1 311
48 「(사관의 비판) 사학 연구의 회고, 전망, 비판」(1)~(6) 김태준, 『조선중앙일보』, 1936.1.1~11 331
49 「고전연구의 방법론-문화유산에 대한 비판적 태도」(1)~(3) 이청원, 『조선일보』, 1936.1.3~7 348
50 「문화투자의 신방면과 그 구체안, 과학박물관의 설립을 제창함」(1)~(7)이승우, 『동아일보』, 1936.1.11~18 360
51 「(사설) 조선연구의 긴급성」 『조선중앙일보』, 1936.2.8 376
52 「시사소감-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1)~(3)이청원, 『조선일보』, 1936.2.15~19 378
53 「시사소의, 독지유력자에 기하는 서」(1)~(5) 안재홍, 『조선일보』, 1936.3.26~31 385
54 「문단시사수제-문화연구기관의 창설」 김한용, 『조선일보』, 1936.5.19 397
55 「(사설) 학술에 대한 관심을 조장하자」 『동아일보』, 1936.5.24 400
56 「(사설) 학예의 조장 유력자의 할 일」 『동아일보』, 1936.6.8 403
57 「(사설) 문화운동의 고성을 고수하자, 지식계급에게 고함」 『조선일보』, 1936.11.23 406
58 「문화단체의 진로, 현대적 조류에 감하여」(1)~(5)한식, 『조선일보』, 1937.1.5~12 408
59 「문화의 민족성과 세계성」(1)~(6)한식, 『조선일보』, 1937.5.1~7 417
60 「논단시평」(2)~(3) 신남철, 『동아일보』, 1937.6.24~25 434
61 「문학대화편, 조선문학의 전통과 고전」(상)(중)(하) 홍명희·유진오, 『조선일보』, 1937.7.16~18 441
62 「문화의 특수성과 일반성-그것의 성립과정에 대한 일반성」(1)~(2) 이청원, 『조선일보』, 1937.8.8~10 450
63 「국외인의 일가언 (1) 자연과학계에 기함」(상)(하) 김태준, 『조선일보』, 1937.10.9~10 455
64 「(사설) 조선문화와 조선어」 『조선일보』, 1937.11.11 460
65 「(사설) 향토문화조사의 의의」 『조선일보』, 1938.3.6 463
66 「(사설) 향토문화의 보존, 향토연예대회의 의의」 『조선일보』, 1938.4.27 466
67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1) 고전부흥의 현대적 의의-심오한 예지의 섭취과정」 박영희, 『조선일보』, 1938.6.4 469
68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2) 고전문학에서 얻은 감상-그 결점과 장처에 관한 재인식」 이희승, 『조선일보』, 1938.6.5 473
69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3) 역사의 전환과 고전부흥-새로운 창조와 건설을 위하여」 박종홍, 『조선일보』, 1938.6.7 477
70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4) 고전 연구와 서적 빈곤-장서가의 서적 공개를 요망」 이여성, 『조선일보』, 1938.6.8 480
71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고전 연구의 역사성 -전통의 전체적 질서를 위하여」(5) 최재서, 『조선일보』, 1938.6.10 482
72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6) 박래문품의 계고난-고전 존중의 관념을 가지자」 유자후, 『조선일보』, 1938.6.11 485
73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7) 고전의 성격인 규범성-참된 전승과 개성의 창조력」 박치우, 『조선일보』, 1938.6.14 488
74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8) 신문화 수입과 우리 민속-인멸의 학술자료를 옹호하자」 송석하, 『조선일보』, 1938.6.15 491
75 「문화의 일반성과 특수성-보편적인 문화와 특수적인 문화」(1)~(4) 김기석, 『조선일보』, 1938.6.16~19 494
76 「논단시감(하) 고전연구 잡상」 김남천, 『동아일보』, 1938.6.30 504
77 「종합논문 (4) 서구정신과 동방정취」(상)(하) 최재서, 『조선일보』, 1938.8.6~7 507
78 「전통의 일반적 성격과 그 현대적 의의에 관하여」(1)~(8) 서인식, 『조선일보』, 1938.10.22~30 513
79 「조선문화자료관의 필요성을 논함」(1)~(4)신남철, 『동아일보』, 1939.1.1~10 532
80 「(사설) 문화자료관의 수집과 이용」 『조선일보』, 1939.3.1 543
81 「(사설) 문화의 심화-더욱 진지한 태도가 필요」『조선일보』, 1939.4.21 545
82 「(사설) 본사 문화상제, 본사의 문화사업상 일 공헌」 『조선일보』, 1939.4.22 547
83 「(사설) 고문화를 수습하라, 특히 의방유취를 보고」 『동아일보』, 1939.5.10 549
84 「문화의 유형과 단계」(1)~(4) 서인식, 『조선일보』, 1939.6.18~22 552
85 「문화시평」(1)~(4) 이원조, 『조선일보』, 1939.8.8~12 565
86 「서양문명의 동점」(1)~(4) 김명식, 『조선일보』, 1939.10.27~11.1 575
87 「문화현세의 총 검토, 초유의 예술종합논의 토의되는 제 문제에 문화인의 진지한 기염」(1) 『동아일보』, 1940.1.1 586
88 「학술조선에 전진령! 학계진흥책을 듣는다-경성제대에 고한다, 농성주의를 버리라」『조선일보』, 1940.1.3 596
89 「학술조선에 전진령! 학계진흥책을 듣는다 -후진학도 지도는 어떠케, 아카데미 출현 대망, 현유 기관을 더 충실하게」『조선일보』, 1940.1.3 600
90 「학술조선에 전진령! 학계진흥책을 듣는다 -사전에 이러케 요망한다, 대학의 대용기관 교수진을 정비하라!」『조선일보』, 1940.1.3 603
91 「평단 3인 정담회 문화문제 종횡관」(상)(중)(하) 서인식·박치우·김오성, 『조선일보』, 1940.3.15~19 606
92 「(나의 졸업논문 주제 1) 이야기책과 현대, 고전의 재인식과 그 소화」(1)~(6) 신구현, 『조선일보』, 1940.5.28~6.5 616
93 「조선학의 본질과 현상」 홍기문, 『조선일보』, 1940.8.5 631
간행사 634
조형열 趙亨烈, Cho Hyoung-yerl
동아대학교 역사문화학부 사학전공 조교수.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백남운·김태준·이청원 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학문론과 역사서술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고려대학교 BK21+한국사사업단과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사업단에서 연구교수로 일했다. 한국근현대 지식인의 생각을 다루는 사상사·학문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학술문화기관 구상과 과학적 조선학 수립론」,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프롤레타리아문화운동과 ‘실천적 조선연구’론」, 「1930년대 조선 역사과학의 연구방법론」 등 다수 논문을 발표했고, 『20세기 전환기 동아시아 지식장과 근대한국학 탄생의 계보』, 『동아시아 혁명의 밤에 한국학의 현재를 묻다』 등 공저서 작업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