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경 평론집 <장면의 소설>. 이 책은 박완서, 김승옥, 성석제, 오정희, 김훈과 한강부터 이기호, 권여선까지 우리 한국소설을 촘촘하게 수놓은 장면들을 별처럼 좇으며 하나의 장면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부터 사람이 사는 삶자리를 그려내려는 시도이다.
책머리에
1부 현대의 얼굴
나는 물건이다, 라는 자각_최인호, 「타인의 방」
기름진 시대의 행복, 혹은 삼켜진 비명_박완서, 「지렁이 울음소리」
‘무언가 필요해진다’, 혹은 빼앗긴 주어의 자리_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2부 도시의 기억
무진과 서울 사이, 오뒷세우스의 귀환_김승옥, 「무진기행」
국기게양대의 또 다른 용법_이기호, 「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 2」
‘그렇게 컸다’의 회고와 ‘가자’의 당위_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3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_한강, 『소년이 온다』
칼로 길을 열 것인가, 글로 길을 열 것인가_김훈, 『남한산성』
부드러운 곡선으로 남는 역사의 시간을 생각하다_양귀자, 「천마총 가는 길」
4부 질병의 사회학
‘평형감각’이 잃어버린 것_박완서, 「유실」
‘각자’의 코끼리, ‘함께’하는 산책_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변비 혹은 배설의 사회학_양귀자, 「지하생활자」․박민규, 「야쿠르트 아줌마」
5부 어머니, 너무 무거운 이름
생존의 말, 통곡의 힘_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흔들리는 기차, 흔들리는 엄마-여자_공선옥,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_김애란, 「칼자국」
6부 아버지의 초상
개흘레꾼 아버지의 ‘마이 웨이’_김소진, 「개흘레꾼」
스러지는 영웅, 허풍의 서사_성석제,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상상하건대’, 아버지는 뛰고 계신다_김애란, 「달려라, 아비」
7부 우리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유년의 뜰, 혹은 깨진 거울의 시간_오정희, 「유년의 뜰」
부엌의 아들, 어둠 속으로 내려오다_김소진, 「부엌」
실낙원, 추방된 이브의 운명_전경린,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8부 내 안의 또 다른 나, 욕망의 얼굴
흡혈귀의 호출_김영하, 「흡혈귀」
그림자, 천국의 문을 두드리다_김경욱, 「천국의 문」
욕망과 금기 사이, 늑대가 있다_이혜경, 「늑대가 나타났다」
9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검은 선들의 행로, 슬픈 농담_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실연의 수습, 혹은 ‘보잘것없는 것들’을 수용하기_권여선, 「사랑을 믿다」
꽃이 되는 어둠의 마술_구효서, 「사자월-When the love falls」
10부 일탈의 꿈, 일상의 덫
호리병에 갇힌 요괴, 비밀의 드라마_김영하, 「사진관 살인사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불’을 기억하는 이야기_한유주, 「재의 수요일」
엘리베이터는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_김인숙, 「술래에게」
11부 죽음 혹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주어가 되는 법, 혹은 끝내 주어가 될 수 없음에 대하여_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_박완서, 「그 남자네 집」
시간의 그물과 우물의 전설_오정희, 「옛우물」
12부 그래도, 다시 사랑
사랑하다,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가장 멋진 문장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놓쳐버린 손, 혹은 놓을 수 없는 손_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이제는 땡’, 마술의 손_윤성희, 「어느 밤」
_ 책머리에
이 책 속의 글들은 소설의 어느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를 매혹시킨 어느 한 장면, 우리를 감동시킨 어느 한 장면, 이상하고 수상해서 수수께끼처럼 남은 한 장면, 어쨌든 우리를 흔들어놓은 한 장면, 그래서 책을 덮은 뒤에도 내내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는 한 장면이 이 글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 장면에 이끌려 소설을 읽기도 하고, 그 장면을 이해하면서 소설을 덮기도 한다. 그 장면은 소설의 입구가 되기도 하고 출구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장면을 읽기 위한 작업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 이 책은 그 장면을 통해 소설을 읽고 이해하려는 시도다.
당신들을 잃은 뒤,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_한강, 『소년이 온다』
‘눈’은 끊임없이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게 하는 몸이다. 어느 증언자의 고백처럼 그날의 장면들, 얼굴들은 “도려낼 수도 없는” “눈꺼풀 안쪽에 박혀서” 지워지질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눈을 감고 싶어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을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정대의 혼도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몸을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다면”, “깜박 잠들 수 있다면” 하고 바라고, 은숙이 도청을 빠져나올 때 마지막으로 봤던 것도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떨리고 있던 동호의 “눈꺼풀”이었다. 죽음으로 건너간 동호의 마지막은 그렇게 ‘눈’의 모습으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교대 복학생이었던 인물도 김진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함께 감옥에 있을 때 그가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다 집어 먹어 버릴까봐 긴장하던 자신을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이라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그 ‘눈’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_박완서, 「그 남자네 집」
박완서의 인물들은 원래 한 남자를 향해 애가 닳는 순정파가 아니다. 그녀들은 세상의 이치에 일찍 눈을 뜬 그래서 계산에 밝은 똑똑쟁이들이다. 전쟁 중 사랑은 언감생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남자’는 불행과 상처뿐이던 그 시절 그저 ‘웬 떡’처럼 다가온 행운이었다. 그 진술에는 감상이나 달콤한 감정이 없다. 그저 계속되는 불운의 시절 속에서의 예상치 못한 행운의 감격이 있을 뿐. 그래서 그의 경박함이 느껴질 때조차 그녀는 “아직도 그는 나의 ‘웬 떡’이었으므로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형이 월북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 이 세상에 웬 떡이 어디 있을라구. 께적지근한 낙담으로 똥 밟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웬 떡이냐”에서 “웬 떡이 어디 있을라구”로 이동해가는 마음의 변화는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행운과 불운에 대한 것이다.
황도경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 <문학사상>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 <우리시대의 여성작가>, <욕망의 그늘>, <문체로 읽는 소설>, <환각>, <유랑자의 달>, <문체, 소설의 몸>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고석규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